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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 열전- 권우 홍찬유 선생

관리자   /   2019-11-12

권우 선생의 가르침 - 공부는 일상에서 끝까지 하는 것

 


신창호(고려대학교 교수)
 
先生贊裕이고 泰聲이며 卷宇貫鄕南陽이다. 1915(乙酉) 95京畿道 漣川郡 嵋山面(白鶴面) 石墻里에서 태어났다. 3세 때부터 祖父에게 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했고, 5세 무렵에 童蒙先習, 啓蒙篇 등을 모두 읽었다. 7세 때 봄에 조부와 냇가로 산책을 나갔다가 너는 를 지을 수 있느냐라는 조부의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강가의 버들가지 바람에 움직이네(江柳枝動風)”라고 읊었다고 한다. 이후, 10세 때, 嵋左 鄭炁 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926(丙寅) 12세에 서구 신학문이 들어와 공부할 것을 권고 받았으나 漢學에 뜻을 두었다.
 
1928(戊辰) 14세에 결혼하였으나 오직 학문에 뜻을 두고, 15세에 상경하여, 독립운동가 偶丁 林圭 先生을 모시고 정진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 創氏改名을 비롯한 억압에 항거하여, 憂國之士를 찾아 滿洲, 上海 등지를 周遊하다가 19456월경에 귀국하였다.
1945년 이후, 30대 초반 무렵, 서울신문사에서 주최한 전국 漢詩백일장에서 장원을 하면서 漢詩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시 爲堂 鄭寅普 先生이 심사위원장이었는데, 선생은 이 대회에서 조선 최고의 漢詩의 능력을 인정받고 위당 선생과 교분을 쌓으며 더욱 학문에 전념하였다.
196853세 때, 社團法人 儒道會 설립에 참여하여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을 昻揚하는 데 기여하였고, 1972槐南 金元泰, 小泉 李圭喆, 靑冥 任昌淳, 夏丁 吳養龍), 靑谷 尹吉重 先生 등 여러 선학들과 觀水會라는 詩壇을 구성하여, 매월 경향의 유명한 山水에 모여 逍遙遊하며 각자의 뜻을 담은 시편을 만들었다.
197964세 때, 유도회 부설 漢文硏修院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에 나섰다. 19863월부터는 한문연수원 獎學生班 3년 과정을 개설하여 四書三經을 무료로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선생이 생전에 약 20년간 장학생반에서 길러낸 학자들은 전국 대학의 박사급 교수만 해도 100여명에 달한다. 선생은 한문연수원에서의 교육뿐만 아니라, 서울대, 성균관대, 국사편찬위원회 등 전통 한학을 요청하는 여러 대학에 출강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書藝 國展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사업에 참여하여, 栗谷集을 비롯하여 수십 편의 고전을 번역하였고, 이외에도 전통 漢詩龜鑑이 되는 詩畵叢林, 槿域書畵徵 등도 번역하였다. 20013월 영산대학교 석좌교수로 초빙되었고, 20031월부터 사단법인 유도회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2005311享年 90세로 考終하여,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석장리 壬坐安葬하였다. 配位丹陽禹氏11를 두었는데, 아들 思成大宇그룹 상무이사를 지냈고, 賢淑宜寧 南基弼에게 출가하였다. 思成은 아들 桄善과 딸 雲英을 두었고, 南基弼은 아들 閏軾을 두었다. 桄善은 아들 承益承範과 딸 文庭을 두었다.
 
선생이 逝去하신 이듬해 2006년에는 逝去 1주기를 맞아 문하생들이 힘을 모아 墓碑建立하였고, 2009년 서거 4주기에는 선생의 문집인 卷宇集을 간행하여 영전에 바쳤다.
선생은 靑冥 任昌淳, 金喆熙 선생을 비롯하여 李家源 연세대 교수, 서예가 如草 金膺顯 선생 등 수많은 인사들과 학문적으로 交遊하였고, 문하생으로는 연세대 윤덕진 교수를 비롯하여 고려대 윤경희, 연세대 조기영, 고려대 신창호 등 전국 각지의 동양학 관련 학자가 100여명이 넘는다.
선생의 학문 정신은 한국고전교육원의 설립을 통해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윤덕진, 윤경희, 조기영, 신창호 교수를 비롯한 여러 문하생이 힘을 합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선생은 학문과 후학 양성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세상의 어떤 外物에도 유혹되지 않았고, 시대정신에 투철하였다. 선생은 시를 언급할 때마다 너무 쉬우면 가벼운 데 빠져 격을 떨어뜨릴 수 있으니 적절히 典故를 넣어 품격을 높여야 한다. 시는 眞實을 담아야 하며 동시에 詩人意識이 녹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논란이 되는 신문기사에 당신의 隨想을 한문으로 서술한 一事一言을 통해 학문적 소통을 실천하였다. 그런 치열한 정신은 선생이 손수 짓고 세운 壽堂碑에 응축되어 있다.스스로 평생을 돌이켜볼 때 기록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구나. 역사를 읊은 시 한 수만 남아있을 뿐.” 그 시 한 수가 바로 1976년 충북 괴산군 화양동에서 지은 華陽洞이다.
 
世事替興如掌翻 세상 흥망 손바닥 뒤집듯 해
華陽洞裏過黃昏 화양동 속에 황혼이 짙었구나
崇禎已失中原土 숭정 때 벌써 중국이 망했는데
萬廟奚當此地村 만동묘가 우리에게 무슨 아랑곳이냐
大義尊攘何所益 존양대의라는 게 다 무슨 잠꼬대냐

   假明夢幻了無痕 가짜 명나라 사람도 이젠 다 지나갔네 

 

 작성일 2014.06.12